바르샤바 지하철 M2 라인의 Młynów역 부근 주택가에는 현지인들 사이에서 매우 인기 있는 도넛 가게가 있습니다. 바로 창립자 Władysław Zagoździński의 성을 딴 Pracownia “Zagoździński”(자고진스키 제과점)인데요, 이곳은 천연 재료와 전통 라드로 손수 만든 도넛을 판매하는 제과점으로 Zagoździński가 처음으로 자신의 제과점을 연 1925년부터 그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고 합니다. 제과점 웹사이트에 따르면 1925년 개인 제과점을 연 이후, 1939년 전쟁 발발 전까지는 확장 이전까지 할 정도로 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1940년대에는 개인 제과점 건물이 불타면서 가족이 힘들게 생활했으나, Wolska 거리 66번지에서 건물을 재건하고 다시 사업을 재개했다고 합니다. 현재 제과점이 위치한 Górczewska 15에서는 Zagoździński 가족의 3대가 1973년부터 도넛을 연구하고 판매하고 있으며, 4대째 도넛 제조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저는 구글 지도를 보다가 우연히 발견한 곳으로, 제과점 규모는 매우 작고 아담해 보이는데 매일 전통 방식으로 생산한 도넛을 한정 판매하는 곳이라고 하여 궁금한 마음에 찾아가 보았습니다. 일반 주택가 사이의 작은 가게라 얼마나 인기가 있을까 싶었는데, 토요일 오픈 1시간 후 찾아갔더니 이미 옆 건물을 따라 긴 줄이 늘어서 있었습니다. 제가 방문한 날은 2월 중순이라 날씨가 아직 추웠고, 하필 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이라 날씨가 좋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도넛을 사기 위해 모인 현지인들로 가득했습니다. 손님들의 연령대는 다양했는데, 특히 60대 이상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주말 아침 일찍부터 도넛을 사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일행이 아닌 사람들과도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모든 대화 내용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의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왠지 정겹게 느껴졌습니다.

약 50분 대기 후 드디어 제과점 안으로 입장할 수 있었는데, 아담한 내부에도 약 7팀 정도의 대기가 있었습니다. 저보다 미리 도착해 도넛을 사들고 나오는 사람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즐거워 보여서, 사람들을 이렇게 행복하게 만드는 도넛은 얼마나 맛있을까란 생각에 기대감이 더욱 커졌습니다. 카운터를 지키며 도넛 주문을 받고 포장을 하는 분이 웹사이트 설명에 있었던 4대 Sylwia씨인 것 같았습니다. 주문 전화(?)를 받으면서 일을 하는데도 손이 어찌나 빠르신지 마치 손이 날아다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게다가 카운터 뒤로 보이는 다른 공간에서 도넛이 실시간으로 만들어지면서 매대에 채워지고 있어서, 일단 매장 안에서의 회전율은 매우 높았습니다. 또한, 장시간 기름으로 도넛을 튀기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제과점 안이 불쾌한 냄새 하나 없이 청결하게 관리되고 있어서 놀라웠습니다.

제 차례를 대기하며 매장 벽을 둘러보니, 창립자인 Władysław Zagoździński와 제과점에 대한 기사, 가족사진 등이 담긴 액자들이 가득했습니다. 그 중에는 가족 기업을 뜻하는 ‘firma rodzinna’라는 단어가 적힌 액자도 눈에 띄었습니다. 높은 회전율 덕분에 일단 가게 내부로 들어오면 대기 시간이 길지는 않지만, 그래도 차례를 기다리면서 제과점이 어떻게 운영돼 왔는지에 대한 역사를 살펴볼 수 있어 잠시 동안의 지루함을 달랠 수 있었습니다. 카운터 뒤에 위치한 벽 윗부분에는 강렬한 색채로 그려진 그림 한 점이 있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한 켠에 Pracownia “Zagoździński”, Warsaw Spire, 그리고 바르샤바 봉기를 상징하는 Polska Walcząca 심볼의 모습도 보였습니다. 거의 100년 가까이 바르샤바와 함께 성장해온 제과점의 역사를 상징하는 듯한 그림이었습니다.

1시간 가량 대기 끝에 드디어 제 주문 차례가 돌아왔습니다. 도넛 1개의 가격은 4.50zł(한화 약 1,500원)이었고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은 도넛 안에 마멀레이드가 들어간 것과 들어가지 않은 것 2가지가 있었는데, 저는 마멀레이드가 들어간 것으로만 10개를 주문해서 총 45zł를 지불했습니다. 약 100년 간 내려오는 집안의 전통 레시피로, 매일 매장에서 갓 만든 도넛의 가격으로 매우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날 주문한 도넛 중 2개는 집에 돌아가면서 먹을 수 있도록 따로 달라 부탁드렸더니, 도넛을 감쌀 수 있는 얇고 긴 모양의 티슈와 함께 트레이에 도넛을 따로 받을 수 있었습니다. 갓 만들어진 도넛은 겉으로는 화려한 느낌은 없었지만 보기만 해도 신선해 보였고, 달콤한 향기가 진동을 했습니다. 이날 아침을 굶고 온 배고픈 상태에서 얼른 한 입 먹어보니, 새콤달콤한 오렌지 맛의 아이싱과 안에 가득 든 베리 마멀레이드가 부드러운 도넛과 함께 기분 좋은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한국에서 흔히 먹는 찹쌀가루가 들어간 쫄깃한 도넛과는 다르게, 이 도넛은 부드러운 식감이 더 강조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남녀노소 상관없이 누구나 좋아할 만한 맛이었습니다. 그동안 이와 비슷한 도넛은 많이 먹어봤지만, 이렇게 오렌지 맛 아이싱이 발린 도넛은 살면서 먹어본 것 중에 가장 맛있는 도넛이었는데요. 다소 평범해 보였던 겉모습 뒤에 놀라운 ‘반전 매력’을 가진 도넛이었습니다.

도넛 구매 후 집으로 돌아와 포장을 열어 보니, 매장을 나오며 먹었던 그 도넛의 비주얼 그대로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도넛들이 예쁘게 담겨 있었습니다. 구글에 현지인들이 쓴 리뷰를 보면, Pracownia “Zagoździński”의 도넛 제조와 포장 방식이 전통 방식 그대로라고 하는 평이 많은데, 이곳의 도넛을 직접 먹어보니 창립자의 철학과 가족의 전통을 그대로 유지하고자 하는 후손들의 노력이 전해져 오는 느낌이었습니다. 더불어 도넛이 탄생한 배경을 알고 먹으니, 더욱 맛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포장해 온지 반나절 정도 지나서 먹었을 때에도, 아이싱 덕분에 도넛 내부가 촉촉하고 부드럽게 유지가 되어 여전히 맛이 좋았습니다.

이렇게 Pracownia “Zagoździński”는 100년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폴란드인의 희노애락과 함께해 온 제과점 그 이상의 장소였습니다. 전후 폐허 상황에서 온가족이 사업을 다시 일으키고, 4대째 그 사업을 이어오고 있는 Zagoździński 제과점의 이야기는 한 편의 영화로 만들어져도 전혀 손색이 없을만합니다. 이곳은 일요일을 제외한 매일 오전 9시부터 당일 제조한 도넛이 소진될 때까지 판매하며, 종종 인스타그램을 통해 도넛이 소진되었다는 소식을 알리기도 하는데요. 일반적으로 긴 대기가 생기는 듯 하므로, 최대한 이른 시간에 방문하시기를 추천드립니다. 웹사이트를 통해서도 도넛을 주문할 수 있는데, 직접 제과점에 방문해서 픽업하거나 40개 이상이면 배달도 가능하다고 합니다. 폴란드의 100년 역사가 담긴 도넛의 맛이 궁금하시다면, 바르샤바에서 이곳을 꼭 한 번 방문해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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